문맥 내의 카오스 - 리차드 바인
- woolgachoi
- 2020년 12월 5일
- 4분 분량
부산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장식 미술을 공부한 최울가는 전후 세계 문화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전들 중 하나인, 만화와 여타 지역 그래픽 형태들을 주류 미술로 통합하는 발전에 참여한다. 일그러진 형태와 비밀스러운 상징들의 어휘로 알려진 이 화가는 그 구성적인 기발함과 농담에도 불구하고 종종 심각한 문제들을 제시하는 관행에 박식한 유희적인 감각을 부여한다.
분명히 사회적인 “유형”과 구체적인 개인들이 종이 위에 빠르고 헐겁게 묘사되는 오랜 아시아 만화 전통이 존재한다 - 그러한 기법은 윌리엄 호가스, 오노레-빅토린 도미에 및 토마스 나스트와 같은 유럽의 아티스트들과 같은 기법이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특히 반 고흐, 고갱, 및 포우브의 작품)를 통해 여과된 일본 판화의 납작하고 짙은 패턴과 결합되면 이 만화 같은 유형은 마티스와 피카소와 같은 급진적인 혁신가들의 초기 모더니스트적인 구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풍자적인 19세기 신문 삽화가 - 가장 현저하게는 리차트 F. 아웃콜트의 “호간의 골목길”의 캐릭터인 옐로우 키드를 통해 - 연재 만화로 발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병사들에 의해 해외로 반출된 만화책들은 또 다른 다문화적인 영향의 순환을 촉진하였다.
그의 1939년 에세이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대중적인 형태와 (만화, 영화 및 대중음악 작곡가들을 포함하여) 고도로 지적으로 세련된 예술 간 절대적인 결별을 선고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무너지기 시작한 구분이었으며, 명백한 비평가가 철저히 패배한 미학적인 전투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앤디 워홀, 톰 웨셀만,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아티스트들은 광고, 상업 로고, 제품 포장 및 만화를 열렬하게 이용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더하여, 시카고 심상주의파들은 (부분적으로는 프랑스 아티스트이자 비평가인 장뒤뷔페의 원생 예술의 수용에 의해 촉진되었다) 아웃사이더 미술 의 깊은 감상을 추가하였다 - 아웃사이더 미술은 훈련받지 않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티스트들이 묘사한 원초적인 인물과 충동적으로 장식적인 패턴이었다.
최울가의 경우, 고국과 더 밀접한 영향이 있었다. 한국의 수십년간의 전후 독재, 특히 1980년 광주 항쟁 이후, 지방의 항의적인 작품은 - 민중 미술은 - 종종 투박한 드로잉의 형태를 가졌는데, 이들 그림은 최대한의 심리적, 사회적 효과를 위해 값싼 재료 위에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한국의 경제적인 붐은 광고, 디자인 및 글로벌 대중문화와 관련된 보다 행복한 시각적 어휘를 태동시켰다 - 최소한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아니었다. 한편, 백남준은 - 그는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1950년 한국을 떠났으며 그 후 국제적인 보헤미안 생활을 하였다 - 젊은 한국 아티스트들에게 절대적인 미적 자유의 모델을 제시하였으며, 절대적인 미적 자유는 현대의 재료들과 주제들을 겁 없이 수용하는 것과 연관되었다. 비록 그는 주로 그의 TV 설치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그 이면 주제가 자기-해방인 수많은 화려하고 아이들 같은 드로잉을 그렸다. 그러한 태도의 반향은 일본의 타카시 무라카미의 형식적으로 세련된 작품은 물론 미국의 자유 분방한 거친 아동인 장-미쉘 바스퀴아트의 기만적으로 투박하고 고도로 열정적인 회화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최울가가 그의 예술을 발전시킨 이미지적인 환경이다. 그는 그라피티의 전성기에 성장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문화·예술 파괴주의가 예술이 되었으며, 활발한 태그가 도시의 벽과 지하철로부터, 흰 입방체의 갤러리 벽 위에 걸린 거대한 화면으로 이동하였다. 멕시코 벽화주의자들의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 데이비드 알파로 시퀘이로스 등) 기념비적이고 상징주의적이며 강렬한 색채의 선례는 케이스 해어링 또는 그 후의 반크시 같은 아티스트들의 게릴라 기행을 통해 보다 간결한 스타일로 변환되었다. 아시아에서는 그리고 세계적으로, 포스트-모택동 아티스트들의 1세대가 중국의 오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프로파간다의 추정적인 자연주의를 거부하였고, 이들은 왕 구앙이, 팡 리준, 유에 민준, 젱 판지 등과 같은 아티스트들의 스타일 적이고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구성을 선호하였다. 여기서 전통적인 아시아 미술의 원근법적인 평면성과 획일적인 무명암 표현이 빌보드와 만화책의 그래픽적인 즉시성과 융합되어 풍자적인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 대한 최울가의 회화적 반응은 형식주의와 정신적인 투쟁과 동일시 되는 것들의 - 20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 단색의 배경에 대항하여 일상과 대중문화의 표시들을 흩뿌리는 것이었다. 시계, 개, 헬리콥터, 물고기, 나무, 새, 자, 눈동자, 악어, 수박조각, 별, 꽃, 전구, 나선, 피카소적인 머리 등 - 이것들을 포함한 많은 것들은 방대한 회화적 격앙에서 순환한다. 쑤셔넣은 듯한 구성들은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의 인스타그램적인 감각을 시사한다 - 예외적으로 최울가의 낙서 중 많은 것들은 외적이기보다는 내적이며, 시각적으로 보고적이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충전되어 있다. 그것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동시에 공존하는 것과는 별개로 서로 명백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이미지 형태의 반복과 결합의 유형들인 형태를 찾는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오브제, 사건과 사람들을 어떻게 매일 다루느냐에 관한 것이며, 각 개인은 우리가 그의 의식을 외적인 행동과 기호로부터로만 추론할 수 있는 “블랙 박스”이다.
그리고, 최울가의 프로젝트에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지류가 있다. 그의 작품은 1세기 전에 시작된 오랜 문화적인 반응을 반영하는데, 1차 세계대전 후였던 당시는 전통적인 형식과 구조를 거부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민감한 아티스트들이 세계적인 재앙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정치 사회적인 규범들 (그리고 이에 수반하는 예술적인 형식들)에 대한 회의주의나 경멸로 어떻게 반응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초점 있는 질문은 한 세대 이후에 2차 세계 대전의 공포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은 최울가의 고향인 한국의 전쟁에 의해 더욱 확대되었다. 문명의 이러한 재앙에 의해 자극을 받은 많은 아티스트들은 언뜻 생각하기에 “원시적인” 사회, 아동 및 정신병자의 보다 정통적이고, 원시적인 제작에 대해 루소 같은 열광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반성적인 아티스트들은 - 잭슨 폴락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 원초적인 충동, 잠재의식적인 동기 및 상징, 그리고 정신 에너지에 대한 프로이드의 믿음에 의해 추동되었으며, 의식적인 목적과 문화적인 산물로 불완전하게 승화되었다.
이러한 충동들에 대해 대처하고 그것들을 재연결하는 대안은 종종 전통적인 부르조아 라이프스타일로 위장된 신경증적 거부로 생각되었으며 -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여 1960년대의 반문화주의는 다각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한 명적인 열정과 같은 것은 단색적인 색면에 반대하는 최울가의 이미지 폭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단편화와 혼돈만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산적인 이미지들은 어떻게든 서로 응집하며, 현대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 가장 광범하게 탐구되는 패러독스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버지니아 울프의 달로웨이 여사와 비슷한 작품들에서 이 주창자는 시각, 청각, 후각 및 이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중요한 기억 속에서 지속적으로 심취한다. 거리의 신호들과 대화의 전개는 시와 연극의 회고와 경쟁하며, 일상의 비즈니스는 질투하는 상상과 경쟁하고, 세계사적인 사건들은 안으로 자란 발톱과 즉각적인 주목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자비한 흐름으로부터, 캐릭터들은 최소한 단일의 연속적인 자아의 환상을 만들어내며,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개인적이면서 공공적인 지각과 분출이 매우 무작위적이고 다원적이며, 빠르게 연속적일 때에도, 전지전능한 화자나 또는 그러한 것을 결여한 화자, 즉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은 형태의 구원적인 경험인 전반적인 시각을 어떻게든 추출해 낸다.
최울가의 작품은 우리들을 그러한 육감적이고 인식적인 복잡성으로 내 몰며, 이 때, 출구인 이야기의 통로에 의존하지 않는다. 작가의 초월성을 우리는 계속 거부당한다. 미국의 실험적 작가인 존 바트는 이렇게 표현한다 “재밌는 집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는 계속 최울가의 시각적인 메아리와 왜곡의 방 속에 갇혀있으며 고립되고 방향을 상실하며 어려움에 처하나 즐거움은 존재한다. 진정으로, 우리는 커튼 뒤에 숨은 위대한 오즈인 최울가가 환희의 감각으로 이러한 혼돈을 만들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출입의 비용은 영구적인 혼돈과 신비스러움일 수 있으나, 최울가는 세계의 미친 풍요로움과 삶과 동의어인 압도적인 자극들 속에서 우리와 격렬한 기쁨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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